-시네마토그라프의 도래
세계
에디슨은 키네토 그라프(촬영장치 ) + 키네토 스코프(영상장치) 발명 but 1인1기계라는 점에서 대중영상x -> 실제로 말초적, 원초적 영상 주를이룸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고안된 시네마토그라프 -> 대중상영 목적. 점잖고 일상적 내용이 주를 이루고 3인칭 관점존재
우리나라는?
황성신문에 활동사진 관람 광고 게재기록. 한국에 1897,98년 전후 활동사진 들어왔을 것으로 예측. <피라미드에서 카이로까지>
cf) 고종이 영화본 기록이 존재하긴 하나 이역시 개인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대중영화의 요건충족 x
-기록영화와 함께 선보인 연쇄극
우리나라는 영화 수입국으로서 종주국이 밟는 발명 - 제작 - 흥행이 아닌, 수입 - 제작 - 흥행 과정을 밞음.
10년말 우리나라 활동사진 연쇄극(일명 키노드라마) 시대가 열리며,<의리적구토>가 1919년에 상영됨. 이를 민족사관적 배경에서 한국의 첫 영화라고 보는 관점 존재.
의리적 구토의 내용은 배경은 경성으로하고, 4대문 안에 뭐있나에 대해 설명해주는 정보제공적 성격 가짐(단성사에서 공개, 김도산 극본, 연출)
but 연쇄극은 연극과 영화의 이중적 특성, 서로의 양식적 특성을 손상시켜 지속적 호응을 얻지 못함. 영화의 과도기적 제작과정이라 할것이다.
1921년에 활동사진 -> 영화로 명칭 변경되며, 변사는 대중의 우상으로 여겨짐..
<월하의 맹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극영화
주인공 이월화(기생출신 톱스타), 윤백남.
<장화홍련전, 1924>by 박정현: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이 극장 내 촬영부 신설하여 제작한 영화. 우리나라 배우, 우리나라 감독, 우리나라 자본으로 만들어진 점에서 자주적 역량을 모아 만든 최초의 순수 한국영화임.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일제 강점기 부산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의 영화 제작사 (but 일본인 자본, 기술로 탄생)
해의비곡, 운영전, 암광, 촌의영웅등의 영화제작 but 흥행실패
그럼에도, 1) 최초 영화제작사라는 점, 2) 나운규와 같은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영화인들을 발굴, 인적네트워크 형성의 장이 되었다느 점에서 의의
(남포동 극장가라는 문화공간 형성)
***** 한국의 최초영화는 무엇일까?
후보1. 국경- 1923.1.13 개봉.
감독은 원산만(일본인) (but 김도산이 감독이라는 중국기록 최근에 밝혀짐, 그러나 1921년 김도산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점에서 제작시도했다가 실제 제작은 그에의해 이뤄졌다고 보지 않는 것이 타당) , 제작사는 쇼치쿠, 배우는 한중일 합작, 상영횟수 1회(단성사에서 유료상영),
후보2. 월하의 맹서
경성호텔에서 무료상영됨(상업성 결여). 감독은 윤백남이라는 한국민, 제작은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했다는 점에서 관제영화임. 저축장려를 위한 목적성 영화. 당대 인기 여배우 이월화와 윤백남이라는 한국배우를 출연시킴. 한국어 영화중 흥행한 첫영화라는의의가 있음(이때문에 지방에 영화상영관 생길 정도..)
후보3. 춘향전- 1923.10 개봉
제작비 2만의 블록버스터 영화, 유료상영이며 감독은 하와가야 고슈라는 일본인(한국이름 조천고주) 제작사는 동마문화협회인데 일본인 문화단체임. 그래서 영화수입이 다 일본에게 귀속.
후보4. 장화홍련전 - 1924.9 개봉
제작비 2만원, 감독, 촬영, 제작 모두 한국인에게 이뤄졌으며 단성사에서 개봉된 순수한국영화임
나의생각->
국경이 최초의 영화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우리나라 관객을 타겟으로 한 대중영화라는 점과, 관람료 30전이라는 점에서 상업성도 가미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대중영화로 인정할 수 있음.
비록 1) 1회밖에 상영되지 않은점과 2) 감독과 제작사가 일본국적을 갖고 있고, 3) 배우 역시 한중일 모두 포함된 합작영화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영화라고 볼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존재할 수 있음.
그러나 1회밖에 상영되지 않은 것은 제작사의 자의가 아닌 일제의 검열에 걸려 상영이 중단되었다고 볼 가능성이 크므로, 1회 상영은 문제되지 않음.
더불어 영화의 국적을 판단함에 있어 영화감독의 국적, 영화제작 자본비중의 국적을 중시한다면 오늘날의 세계화 시대에서 많은 다국적 영화의 국적문제 논의가 비생산적으로 흘러갈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어떤 국적의 문화적 배경을 갖고, 어떤 국적의 관객을 주 타겟팅으로 삼아 영화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지가 핵심이 될 것. 예를들어 설국열차를 우리나라 영화로 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감독이 한국문화적 요소를 가미하여, 영화의 이야기를 한국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서라고 판단됨.
이렇게 본다면 국경의 경우, 일본인 제작자에 의한 영화이나, 주요 관객층을 한국인으로 한 조선 최초 활극영화라는 점에서 한국영화라고 볼 수 있음.
한편 다른 후보들이 최초영화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음
1. 월하의 맹서는 무료상영이라는 점에서 상업성을 결여하였고,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제작한 관제영화라는 점에서 내용 역시 상업적 대중영화라기 보다 공익적 목적의 계몽 영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 (저축 홍보물 영상)
2. 춘향전의 경우, 감독이 일본인이나 조천고주라는 한국이름도 갖고 있고, 한국전통이야기인 춘향전을 모티브로 한 유료영화라는 점에서, 상업 대중영화의 징표를 모두 갖춤. 그러나 국경보다 늦게 개봉된 영화인바 최초영화라는 타이틀 갖기 힘듦
3. 장화홍련전 역시, 한국 감독, 배우, 제작자로 만들어진 순수 한국상업영화라 할 수 있으나, 영화 국경보다 늦은 개봉일이라는 점, 그리고 장화홍련전을 최초의 한국영화라고 할 때, 다국적 자본, 다국적 제작사로 구성된 오늘날의 수많은 영화들의 한국국적 상실을 고려한다면 바람직 하지 x
-카프영화운동과 경향파 영화
카프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의미.
예술을 무기로 민족을 일깨우고, 당면해서는 일본제국주의, 더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제도와 맞서 싸워야 함을 강조한 예술단체라 할 것. 우리나라 영화 평론계의 뿌리가 됨. 사회주의와 리얼리즘을 특성으로 삼음.
카프는 영화보다 사실 글쓰기 분야에서 더 두각을 나타냄
but 30년대에선 공리주의 및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cf) 공리주의는 서구 근대자본주의의 핵심) 사회주의 및 리얼리즘 성격이 낮아지고, 영화의 계몽역할(-> 조선민중의 각성의 계기 역할을 하는 영화 추구), 공리성 및 선의성에 대한 강조로 색채가 변화됨 ->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평단의 기조 변화
당시 일제식민정책
-나운규와 아리랑, 민족영화
1926년 6.10 만세운동이 있었던 시기에 아리랑이 상영됨. (식민지 당국의 정치적 탄압과 검열로 인하여) 필름 소실로 현재는 볼 수 없는 상태.
아리랑은 3.1운동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긴 지식인 김영진을 주인공으로 하여, 일본왜경 앞잡이 오기호, 김영진의 친구 윤현구 및 여동생을 등장인물로 한 리얼리즘, 민족주의적 영화 특성을 가짐. 빈곤한 농촌현실을 사실적으로 포착하며, 소작인과 지주의 대립구도를 뚜렷이 함.
영화 시놉시스:어느마을에 광인 영진이 그의 부친,여동생 영희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날 영진의 친구 현구가 찾아와서 영진이가 폐인이 된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어느덧 영희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한편 그 마을 악 덕지주의 청지기인 오기호는 영희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중 마을 잔칫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동리마당에 모여있는 사이를 틈타서 영희를 겁탈하려 한다. 때마침 현구가 나타나 오기호와 싸우던 끝에 영진이 휘두르는 낫에 오기호가 쓰러지고, 피를 본 충격에 영진은 제정신을 되찾으나 이미 살인범이 된 영진은 쇠고랑을 차고 일본순사에게 끌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한국영화의 이념을 최초로 제시한 영화(일본의 제국주의 극복 및 사회주의 사상 내포 -> 한국적 성격을 가지고, 식민시대 배경으로 하여 반영웅으로서 나운규의 스타페르소나 자체로 식민지 현실에서 저항의 의미를 내포),
-대흥행 영화(상영 542차례),
-일반 대중 외에도 지식인들에게도 호응을 얻은 영화(세련된 상징미, 환상장면 등의 도입으로 세계 영화사조와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뚜렷한 방법론 위에서 창작됨)
나운규와 카프- 초기 협력적 관계에서 반목관계로..
-내셔널 시네마의 확장
일제탄압에 따른 영화인들의 상해 이주
대부분의 한국영화감독은 영화만들기를 포기하였으나, 허영은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친일영화 제작하는 것을 선택. 전쟁이후엔 인도네시아에 남아 시네마테크, 여오하 학교등을 건립하며 인도네시아 영화의 아버지 '닥터 후융'으로 거듭남.
: 국경을 넘어서는 활동을 본격화 하려는 21세기에 있어 내셔널 시네마에 대한 사유의 확장 필요성을 암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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